남의 집 이야기

8-2 애인의 방을 꾸며주기

fictocritical 2020. 9. 8. 14:27

 

사실 그의 코딱지 만한 방을 이런 저런 재활용 가전과 싸구려 가구, 행거 등으로 채우는 건 모두 내가 했다. 알고 보니 나는 집안일을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더구나 가구를 새로 들이고 집을 꾸미는 건 특히나 내가 재미있어 하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당시의 젊은 내가 세련된 취향을 갖추고 있던 건 아니었다. 애인의 방은 나의 삐딱한 미의식과 저렴한 아이디어로 채워졌다. 나는 이사의 전 과정을 주도한 것은 물론 이후 몇달 동안 계속된 정리와 청소도 모두 자발적으로 했다. 우렁각시가 따로 없었다.

 

예전과 비슷하게, 애인은 주중에 회사와 코앞의 원룸을 오가고, 주말에는 좀 넓은 나의 집으로 오면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는 굳이 주말이 되면 애인의 원룸으로 가서 가재도구 쇼핑과 집 안 정리, 청소에 열을 내곤 했다. 물론 아주 오래 가지는 않았다.

 

점차 애인의 집에 가지 않게 된지 몇 달 되던 어느날, 무슨 일인지 오랜만의 금요일 밤, 나는 애인의 집으로 향했다. 물론 미리 연락은 하고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집에 들어선 나는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했다.

 

그의 집 전체가 푸르게, 희끄무레하게, 보들보들한 곰팡이로 덮여 있었다. 간혹 싱크대나 화장실이 그런 꼴인 건 본 적 있지만, 냉장고와 식탁, 침대 옆 탁자에까지 곰팡이가 뽀얗게 핀 풍경은 처음 보는 듯했다. 아마 계속 보일러는 뜨듯하게 틀어두고, 춥다며 창문은 비닐로 틀어막고, 청소는 안 하고 수시로 빨래는 해서 널면서, 환기 한 번 안 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 풍경과 냄새에 나는 기겁했지만, 눈이 무척 나쁜 데다가 비염이 있어 코도 막혀 있던 애인은 전혀 몰랐던 모양이었다. 아니면 그냥 무관심했거나.

 

버럭 화를 낸 나는 근처 호텔로 피신했다. 망원동 나의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그러기가 싫었다. 사실 나의 집도 꽤 지저분한 상태였다. 좋은 호텔의 새하얀 침구에 몸을 뉘여야 그 끔찍한 방에 들어갔다가 나온 심신이 정화될 것 같았다. 그러나 20만원이나 주고 방을 잡은 특급호텔은 꽤 낡은 곳이어서, 밤새 에어컨 환풍구에서 퀴퀴한 곰팡이 냄새를 토해내는 듯했다.

 

애인은 그렇게 원룸에서 1년 정도 지내고 나자 아토피성 발진이 생기기 시작했다. 대상지는 등짝이었다. 이상하게 등만 자꾸 가렵다며 피가 나도록 긁어댔다. 얼마 지나자 온 등짝 전체가 벌겋게 달아오르고 여기저기 검붉은 딱지가 졌다.

 

심지어 한 번은 회사 동료가 그런 말을 했다고 한다. 회사에서 물건이 분실되어 혹시 도둑이 들었나 하고 cctv를 죽 빠르게 감으며 확인했는데, 나의 애인이 cctv 앞을 수시로 지나가는 모습이 유난히 눈에 띄더란다. 팔을 꺾어 손을 뒤로 돌려 계속 등을 긁으면서. 곧 그의 티셔츠들의 등짝도 핏자국으로 얼룩지면서 빨아도 지워지지 않게 됐다.

 

실은 그 원룸의 위생 상태뿐 아니라 내가 꾸민 인테리어(?) 자체에도 문제가 많았다. 모든 가구의 재료가 MDF라는, 나무 가루에 본드를 섞고 압착시켜 만든 유해물질로 구성되었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겉에 도색이 된 침대 프레임이나 식탁은 유해성분의 방출이 좀 덜 했지만, 공간박스는 아예 페인트 칠이나 니스 칠도 안 된 생 MDF 그 자체로, 방에 들어서면 진동하는 본드 냄새를 계속 뿜어내고 있었다.

 

당시 나는 그런 공해 문제에 무지했다. 십년도 더 지나서야 환경에 대한 인식도 생겼더랬다. 왜 갑자기 애인에게 아토피가 생겼는지 짐작도 못한 채, 양의에게 가서 스테로이드 연고를 처방 받게 하거나, 같이 용하다는 한의원을 찾아다니며 약을 지어 먹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