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집 이야기

8-3 강남 입성기

fictocritical 2020. 9. 28. 09:53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애인의 집이 좋았다. 지금 생각하면 맨날 홍대 근처만 맴돌다가 강남이라는 새로운 동네에 들어서게 되니 새로운 기분이, 기분 전환이 되었던 것 같다. 오히려 내가 그의 집에서 죽치고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처음 핑계는 애인의 원룸을 사람이 살만한 곳으로 바꿔놓는다는, 꾸민다는 것이었지만, 정남향인 그의 집 통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받으며 책상에 앉아 있다가 근처 양재천으로 산책을 나가는 하루를 즐기게 됐다. 원래 등받이 없는 스툴 의자 하나만 달랑 놓여 있던 그의 책상에 꽤 비싼 가죽 회전의자까지 사놓게 됐다. 

그런데 정작 애인은 내가 자신의 집으로 오는 것을 질색하면서, 설령 주말을 그 집에서 지내게 된다고 해도 절대 집 근처를 돌아다니지는 않으려 했다. 집 바로 앞이 회사다보니, 회사 사람들과 마주칠까 겁난다고 했다. (실제로 마주쳐서 후다닥 도망친 적도 가끔 있었다.) 

애인과 같이 양재천에서 자전거도 타고 대모산으로 등산도 가고 싶은데 너무 싫어만 하는 그에게 왜 회사 사람들과 마주치는 게 싫으냐고 물었다. “싫지, 그럼 좋아?”라는 반문에, 집요하게 “여기 산다고 하면 되지? 한 번 들어와 보라고 하면 되지?’ 하며 캐묻다가 결국 놀라운, 근본적인 대답을 들었다. “코딱지만 한 골방에서 사는 게 창피해.”

당시 우리는 삼십을 갓 넘긴 젊은 나이였다. 고시원에서 사는 청춘들도 많은데, 낡고 좁으나마 갖출 것 다 갖춘 버젓한 원룸에서 사는 게 왜 창피한지 알 수 없었지만, 애인은 트위터 계정까지 ‘골방샌님’으로 이름지으며 은근히 자신의 가난(?)을 과시하는 것도 같았다. 지금 생각하면 저렴한 나의 인테리어 취향도 그의 부끄러움에 한몫했던 게 아닐까 싶다.

사실 애인의 집 근처엔 그 유명한 ‘타워 팰리스’가 있었다. 당시 성공과 부의 상징처럼 새로 솟아올랐던 곳이다. 나는 애인을 ‘골방’에 내버려두고 양재천으로 산책을 나갔다가 타워 펠리스의 으리으리한 상가에 들러 멋진 케이크를 먹으며 분위기를 내는 데 재미가 들렸다. 거기 ‘스타슈퍼’에도 들러 비싼 식재료를 사오기도 했다. 평소 장은 집 바로 앞의 하나로마트에서 보았지만 가끔 스타슈퍼까지 가서 트러플, 캐비어, 푸아그라 등 진귀한 녀석들을 구경하다가 한 개에 3천원짜리 유기농 호박과 양파 등을 사가지고 와서 된장찌개를 끓여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