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동네 친구와 이웃 분쟁
저번 글을 쓴 지 시간이 많이 지났다. 1년쯤 지났을까. 자주 열심히는 쓰지 못해도 띄엄띄엄 꾸준히는 쓰고 있다. 그래서 이제 여섯 번째니까 정말 ‘집’ 이야기를 쓸 차례가 됐는데, 결국 이번에도 동네 이야기를 해야 될 것 같다. 명색이 집 이야기를 쓰기로 한 블로그인데, 무려 6회째 동네 이야기만 쓰고 있는 것이다. 이사, 카페, 남산, 군기지, 외국인 자영업자 이야기에 이어 이번에는 ‘이웃들’ 이야기를 쓰려는데, 정말이지 이걸로 이태원 동네 이야기는 마무리를 지으련다.
원래 나의 은둔지로 시작되었던 경리단 집은, 아니 이태원 동네는 결국, 내가 살았던 그 어느 동네보다 동네 주민과의 교류가 많았고 추억이 많이 쌓인 곳이 되고 말았다. 생각해 보면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내가 살던 주거 지역은 동네 친구라곤 없는 곳들이었고, 놀거나 친구를 만날 때는 항상 유흥가로 나갔다. 그러나 이태원 집은 애초에 친구 때문에 이사 온 곳이었다. 게다가 내가 이사한 후에 한 친구가 나를 따라 같은 단지로 이사를 오기까지 했다. 원래 노리고 있던 곳이라면서 말이다. 또 거기에 더해, 친구의 친구로 만나 친해진, 근처 사는 친구가 생겼고, 나의 동거인에게는 알고 보니 회사 동료가 셋이나 같은 단지에 살고 있어서, 그들 중 일부와 교류가 생기기도 했다.
애초에 이사 계기가 되었던 친구와의 추억은 다른 블로그(https://blog.naver.com/uchatn/221988269144)에 썼고, 나를 따라 이사온 친구랑은 종종 서로의 집에서 고기를 구워 먹는 사이가 되었다가 이제는 절교했는데, 그 이야기는 아마 다른 블로그에 쓰게 될 것 같다. 한때는 서로를 비상 연락처로 지정할 정도의 사이였는데 말이다. 동거인의 회사 동료들은, 우리를 정식으로 초대한 사람도 있었고, 그냥 도움만 받으려 불러내기도 하고, 쓰레기장 등에서 우연히 만기도 하고 소소한 이벤트들이 있었다.
어쨌든 거의 마을 느낌이 날 정도로 이웃이나 친구와 교류하며 살게 된 그곳은 남산 중턱의 거의 유일한 아파트 단지였다. 잠수교에서 남산3호 터널을 지나 시청으로 가는 8차선 도로변에 있어서 꽤 눈에 띄는 단지였는데, 대로변에 있어서 시끄럽지 않을까 싶었지만 막상 단지 안으로 들어오면 고즈넉한 분위기였다. 조경도 잘 돼 있어서 봄이면 살구, 가을이면 감을 따는 재미도 있었다. 이사간 첫 해에 감따는 막대를 구매해서 휘둘렀더니, 구경하던 다른 주민들도 따라 구매하더라.
장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엘리베이터 없는 5층 아파트인 데다가 오래된 단지여서 시설이 낡았다. 섀시 등 단열도 문제지만 최악은 중앙난방, 즉 내 집의 난방 정도와 시기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는 시스템이었다. 관리실에 연락해볼 수는 있지만 어떤 결정이 내려지든 그냥 꼼짝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니 결국은 전기 난방기와 에어컨을 사서 보조를 해보는 수밖에.
낯선 이웃과의 교류(?)도 이 아파트 단지에서 처음 해본 셈이었다. 남들 다 겪는 층간 소음 때문은 아니었지만, 위층에서 식물을 대량으로 기르며 화분에 주는 물이 여름에 열린 창으로 자꾸 쏟아져 들어오는 바람에에 얼굴을 붉힌 적이 있었다.
가끔 주민 자치 센터에서 벼룩시장이 열리곤 했는데, 연남동, 망원동에서 사용하던 자전거를 여기서 팔았던 일이 기억에 남았다. 아무래도 남산 중턱에 위치한 동네다 보니 자전거를 탈 일이 없어서였는데, 이태원이라는 동네답게도 동성애자 커플에게 넘겨주게 돼서 재밌었다.
그러던 와중에 경리단길이 정말 무섭게 떠버렸다. 사방에서 인테리어 공사와 신축 공사 소음이 시끄럽게 울렸고 평일에도 심심치 않던 데이트족과 소풍족, 출사자들이 주말이면 인산인해를 이루기 시작했다. 누군가 쓰레기 버리러 나갔다가 카메라 셔터가 마구 터져서 깜짝 놀랐다던 말처럼, 내가 주거 지역에서 사는 건지 관광 지역에서 사는 건지 구분이 안 되기 시작했다. 젠트리피케이션의 원조 동네로 각인되면서, 이어지는 망리단길, 중리단길, 송리단길, 황리단길, 봉리단길까지 유명해지며, 슬슬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두고 지인들은 ‘뜰 동네’를 찾아 이사다니는 것 같다고 말하며, 다음 이사갈 집이 어디일지 기대된다고까지 하는 이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