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체 글

(39)
10-4 오피스텔 생활 1 옆집의 호텔 그렇게 나의 일산 생활이 시작되었다. 아마도 남산 대신 호수공원으로, 등산 대신 자전거로, 산책을 나가는 생활이 되리라는 희망찬 예상을 했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나는 오피스텔 작업실에서 은둔형 외톨이에 가까운 생활을 하게 되었다. 하루종일 책상 앞에 앉아 있다가, 아래층 피티샵으로 운동을 갈 때를 제외하면, 현관문 밖을 나서는 일조자 별로 없었다. 도보로 5분 거리 호수공원에는 일년에 한 번 갈까말까 했고 자전거는 바로 옆 쇼핑몰 건물에서 식료품을 날라오는 용도로만 쓰게 됐다. 대신에 오피스텔 건물 내의 쿰쿰한 공기와 얼굴이 없다시피 한 행인들에 익숙해졌다. 그 자체가 실은 여행과 꽤 닮은 것들이었다. 즉 나의 작업실 바로 앞집이 어느 호텔의 ‘브랙퍼스트 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아침마다 앞집에서 수..
10-3 오피스텔 복층 공사 한눈에 반해버린 오피스텔을 계약했다. 하지만 당장 이사할 수는 없었다. 지은 후 10년 동안 쭉 주인의 딸이 살아온 오피스텔은 좀 낡은 데다가 복층 공사가 돼있지 않았다. 주방과 화장실 위쪽 천장의 가벽을 허물고 남는 공간을 복층으로 만들어 두는 게, 살기에도, 부동산 가치를 높이는 데도 좋았다.서너 군데 인테리어 업체에 연락해서 견적을 받아보았다. 멋져 보이는 업체에서는 여자 대표님이 직접 내방해 상담을 해주면서, 고객은 신경 하나도 안 써도 되게, 예쁘게, 완벽하게 공사를 해주겠다고 했다. 그만큼 비쌌고 또, 왠지 내 의견은 안 듣겠다는 말로 들려서 거부감이 들었다. 조금 실용적으로 보이는 업체의 대표님은 서글서글한 남자분이어서 자재 종류부터 디자인 동향까지 온갖 얘기를 하다가 여동생 수술 상담까지 ..
10-2 일산에서 작업실 찾기 지하철에서 나와 호수공원으로 직진했다. 지하철에서 가장 가까우면서도 호수공원 바로 앞에 있는 오피스텔 건물부터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 다음엔 그 옆 건물, 그리고 그 옆의 건물 1층에 위치한 부동산 중개소에 차례로 들어갔다. 웬만하면 호수공원 앞에 있는 건물들은 다 돌아보고 고르고 싶었다. 근데… 오피스텔 건물이 생각보다 무척 컸다. 건물 하나하나가 그냥 한 채의 건물이라기보다는 가운데 중정을 두고 ㅁ자 형태로 지어진, 거대 블록, 빌딩군이었다. 알고 보니 한 블록당 5백에서 1천 세대가 입주해 있는, 건물 한 동이 동네 하나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블록마다 차례로 들어가서 한두 개 물건을 보고 나오기를 반복하다보니 겨우 서너 개 빌딩만 거쳤는데도 어느덧 저녁이었다. 선선한 가을이었는데도 땀에 절고 발..
10-1 서울 탈출기 나와 애인은 자주 싸우는 편이었다. 처음에는 그래도 심각한 갈등은 없는 편이고 둘 다 뒤끝이 없는 성격이라 시간이 좀 지나면 대충 풀어져 또 아무렇지도 않게 티격태격 지내곤 했다. 그런데 한 집에 살게 되면서 매일매일 부대끼다보니 싸움의 양상이 점점 심각해졌다. 상했던 감정이 회복되기 전에 또 싸울 거리가 생겼다고나 할까. 집에서 일하는 직업이라 더 그런 걸 수도 있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해낸 해결책은 ‘내가’ 따로 작업실을 얻어서 반쯤 집을 나오는 거였다. 예전부터 로망이기도 했다. 오피스텔을 얻어 우아한 작업실을 꾸며놓고 고독하게 밤낮으로 일하는 프리랜서. 나도 그걸 꼭 한 번 해보고 싶었다. 다시 홍대쪽으로 가야 하나 싶기도 했지만, 내겐 너무 비싼 부동산 가격에다가 환경도 열악해질 가능성이 컸..
9-7 골방을 선택하던 장녀가 배우자와 각방을 쓰기까지 나와 동생은 연년생 자매로 태어났다. 우리 둘 다 아기 때는 안방에서 엄마아빠와 함께 잤다. 그러다가 사람 구실을 할 수 있게 되면서는, 둘이서 거실을 건너, 건넌방으로 갔다. 거실을 사이에 두고 안방과 마주보는 방을 건넌방이라고 했다. 거기서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 우리 자매는 한방을 썼다. 같이 잠자리에 누워 버둥거리며 까르르 웃거나, 나란히 책상을 맞대고 알콩달콩 숙제를 하기도 했지만, 방바닥을 굴러다니며 투닥거리고 씩씩거릴 때가 많았다. 그러다가 슬슬 사춘기가 오기 시작하던 초등학교 고학년 어느날, 나는 건넌방에서 짐을 뺐다. 그리고 부엌 옆에 붙은 골방으로 옮겼다. 거기는 원래 이른바 식모방으로 설계된 곳이었다. 옛날 주택엔 그런 게 있었고, 크기가 건넌방의 3분의 1쯤 되는 공간이었다. K..
9-6 동네 친구와 이웃 분쟁 저번 글을 쓴 지 시간이 많이 지났다. 1년쯤 지났을까. 자주 열심히는 쓰지 못해도 띄엄띄엄 꾸준히는 쓰고 있다. 그래서 이제 여섯 번째니까 정말 ‘집’ 이야기를 쓸 차례가 됐는데, 결국 이번에도 동네 이야기를 해야 될 것 같다. 명색이 집 이야기를 쓰기로 한 블로그인데, 무려 6회째 동네 이야기만 쓰고 있는 것이다. 이사, 카페, 남산, 군기지, 외국인 자영업자 이야기에 이어 이번에는 ‘이웃들’ 이야기를 쓰려는데, 정말이지 이걸로 이태원 동네 이야기는 마무리를 지으련다. 원래 나의 은둔지로 시작되었던 경리단 집은, 아니 이태원 동네는 결국, 내가 살았던 그 어느 동네보다 동네 주민과의 교류가 많았고 추억이 많이 쌓인 곳이 되고 말았다. 생각해 보면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내가 살던 주거 지역은 동네..
9-5 경리단 자영업자들 경리단의 진정한 주인이라고까지 말하긴 힘들겠지만, 경리단의 주류는 분명 자영업자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식음료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말이다. 특히나 경리단길을 경리단길로 만든 건, 특색 있게 만든 건 외국인 자영업자들이었다. 다양한 인종의 외국인들이 어떻게 해선지 누구보다 부지런하게 개성을 펼쳐 보이며 장사하고 있었다. 그들 곁에는 아마 한국인 조력자들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아내라든지… 아니면 아내라든지 말이다.   가장 유명한 곳이자, 내가 가장 자주 오래 드나들었고 눈여겨 본 곳은 지금도 남아 있는 베이커스 테이블이라는 곳이다. 거대한 덩치의 독일 아저씨가 운영하는 빵집이자 식당인데 세련된 감각에 엄청난 부지런함과 노련하고 통 큰 직원 관리가 돋보이는 곳이었다. 아주 옛날부터 한국에서 보기 힘든 맛있는 ..
9-4 용산 기지촌 이야기 그러고 보니 이건 나의 집에 관한 자서전인데 벌써 4회째 집 이야기는 안 하고 동네 이야기만 하고 있다. 원래 동네 이야기도 같이 하려고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동네 이야기만 줄줄이 나오는 건 왜일까... 워낙 특색 있는 동네여서 그랬을까, 아니면 내 관심이 ‘집’보다는 ‘동네’로 즉 사람에게로 옮겨갔기 때문일까. 이태원 동네 이야기를 하자면 힙한 식음료점과 남산 산책로 풍경뿐 아니라 바로 옆의 미군 부대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남산 소월길뿐 아니라 경리단 길 주변에는, 한겨울에도 반바지와 반팔을 입고 조깅을 하는 백인들이 꽤 많았다. 아직 한국인 조깅족은 드문 시절이었는데, 그런 백인들 중에는 그 유명한 ARMY 티셔츠를 버젓이 입고 뛰는, 군인 티를 노골적으로 내는 사람도 많았다.   남산 높은..
9-3 남산을 헤매던 이야기 작은 아파트 단지를 나와 언덕배기를 5분만 오르면 남산 초입이었다. 그곳엔 남산 꼭대기까지 이어지는 2차선 도로와 아스콘 보행로가 붙어 있었다. 마을버스가 세 대나 그 길로 사람들을 실어날랐다. 마을버스뿐이 아니다. 중국인 등을 가득 실은 관광버스도 굉음과 연기를 내며 달려올라갔다. 난 점차 남산 중앙의 보행로를 벗어나 샛길들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남산에는 다양한 숨은 장소들이 많았고 의외로 잘 가꿔진 그런 장소들이 비좁은 산길들로 이어져 있을 때가 많았다. 사람도 별로 없어 으슥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무서울 정도는 아니었다. 갈색 마섬유로 만든 현대판 돗자리 같은 것들이 푹신하게 깔려 있기도 한 산길들을 걷다보면 봄의 나무들이 색색의 꽃을 피워내고 여름이 깊어가면서는 앵두, 버찌, 매실,..
9-2 경리단으로 이사간 이야기 직업적으로도, 난 경리단으로 이사가면서 그 동안 일곱 군데나 옮겨 다니던 직장을 관두고 프리랜서로만 일하기 시작하는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렸다. 그와 함께 파티걸의 시절을 마감하고 은둔자 비슷한 모드로 들어섰다. 그런데 그때부터 조금씩 난 카페 생활자 비슷한 게 돼갔다. 밤의 술집에는 발길을 딱 끊었지만 유난히 낮의 카페에 혼자 가 있는 시간이 늘어난 것이다. 이전에는 누구와 만나지도 않는데 카페에 가는 일은 없었다. 랩톱을 들고 혼자 앉아서 무언가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개폼 잡는 거 아닌가 하는 의심을 은연중 하고 있었다. 아직 카공족이 흔하지는 않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어디보다 힙한, 아직 모르는 사람이 많은 거리, 경리단으로 이사간 후에는 카페들을 전전하며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게 나에게 해방감과 ..
9-1 청춘의 고장을 떠나며 내가 홍대에 처음 발을 들였던 건 스무살 무렵이었다. 입학초의 흥분은 사라지고 대학교가 조금 답답하다고 느껴지기 시작했을 때, 고딩 친구를 만나기로 하고서, 요즘 한창 뜬다는 홍대 앞에 가보자고 의기투합했다. 당시 내 눈에 으리으리하게만 보였던 신상 카페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던 홍대앞은, 칙칙하고 음울한 술집뿐인 우리 대학 앞 유흥가와 전혀 다르게 세련된 곳이어서 입을 떡 벌리고 두리번거리며 거리를 헤맸다. 그 후로 나는 틈만 나면 홍대 앞에 가서 놀게 됐다.그리고 20대 후반 부모의 집에서 나와 독립한 후에는 계속 홍대 인근에서만 살았다. 결국 15년 가까이 살았던 듯하다. 내 청춘의 고향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당시 그곳은 서울에서 미술가와 음악가들이 함께 모여드는 거의 유일한 지역이었다. 다른 예..
8-4 대모산과 연예인과 집주인 서울 강서쪽에서 자라온 내 주변엔 강남에 사는 사람이 드물었다. 지금도 내 친구 중에서 강남에 사는 사람은 딱 한 명인 듯하다. 게다가 예전 대학 친구 중에는 강남에서 자란 사람이 둘 있었지만 그들도 지금은 강북으로 이사 왔다. 심지어 유일한 강남 거주민인 친구도 그녀의 대부분 친구들이 강북에 있고 본인 역시 강북에 ‘별장’을 하나 마련해 가끔 거기서 지낸다. 사실 지금 살고 있는 집을 구하기 전에, 방배동 쪽에 집을 알아보러 갔다가 가격과 컨디션에 기겁한 적이 있다. 그 얘기를 하자 친구들은 “대체 거기는 왜 간 거니?” 하는 반응을 보였다. “연예인들이 다 방배동에 산다니 너도 가보고 싶었니?” 하고 물은 사람도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예전 애인의 집 근처 양재천과 양재 시민의 숲, 대모산, 구룡..
8-3 강남 입성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애인의 집이 좋았다. 지금 생각하면 맨날 홍대 근처만 맴돌다가 강남이라는 새로운 동네에 들어서게 되니 새로운 기분이, 기분 전환이 되었던 것 같다. 오히려 내가 그의 집에서 죽치고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처음 핑계는 애인의 원룸을 사람이 살만한 곳으로 바꿔놓는다는, 꾸민다는 것이었지만, 정남향인 그의 집 통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받으며 책상에 앉아 있다가 근처 양재천으로 산책을 나가는 하루를 즐기게 됐다. 원래 등받이 없는 스툴 의자 하나만 달랑 놓여 있던 그의 책상에 꽤 비싼 가죽 회전의자까지 사놓게 됐다. 그런데 정작 애인은 내가 자신의 집으로 오는 것을 질색하면서, 설령 주말을 그 집에서 지내게 된다고 해도 절대 집 근처를 돌아다니지는 않으려 했다. 집 바로 앞이 회사다보니,..
8-2 애인의 방을 꾸며주기 사실 그의 코딱지 만한 방을 이런 저런 재활용 가전과 싸구려 가구, 행거 등으로 채우는 건 모두 내가 했다. 알고 보니 나는 집안일을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더구나 가구를 새로 들이고 집을 꾸미는 건 특히나 내가 재미있어 하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당시의 젊은 내가 세련된 취향을 갖추고 있던 건 아니었다. 애인의 방은 나의 삐딱한 미의식과 저렴한 아이디어로 채워졌다. 나는 이사의 전 과정을 주도한 것은 물론 이후 몇달 동안 계속된 정리와 청소도 모두 자발적으로 했다. 우렁각시가 따로 없었다. 예전과 비슷하게, 애인은 주중에 회사와 코앞의 원룸을 오가고, 주말에는 좀 넓은 나의 집으로 오면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는 굳이 주말이 되면 애인의 원룸으로 가서 가재도구 쇼핑과 집 안 정리, 청소에 열을 내곤 했다..
8-1 혼자 사는 애인의 집 당시 나는 망원동에서 혼자 살고 있었고 애인은 은평구의 부모 집에서 살고 있었다. 당연히 애인은 내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그래도 주중에는 애인이 회사와 부모의 집을 오가느라 나의 집에 잘 못 왔다. 그래서 홀가분하게(?) 지낼 수 있었지만, 주말이면 애인은 나의 집에서 하루종일 뒹굴며 주중 동안 모자란 잠을 몰아잤다. 혼자 지내는 것을 좋아했던 나는 애인에게, 나의 장래 꿈은 그와 각각의 원룸에서, 옆집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각자 독립적으로 생활해야 한다면서 말이다. 솔직히 말하면 애인이 모든 걸 다해주는 부모와 사는 것도 탐탁지 않았고, 나의 집에서 주말을 보내는 것도 불편할 때가 많았다. 주중은 정신없이 보내고 주말에 밀린 집안일을 하는 데 애인이 도움은커녕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7-4 집주인, 상속인, 새주인 2 (앞 글에 이어서) 그런데 그로부터 몇 달 지나지 않아 새 주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을 팔 거라고 했다. 구매 희망자들이 집을 보여달라고 하니 협조 좀 해달라고 했다. 아직 나랑은 전세 재계약을 한 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나는 1년 이상 더 살 권리가 있었다. 내가 이사를 가야 하는 입장이라면, 우리나라 전세 거래의 관례상, 당연히 매수 희망자들에게 집을 보여주는 절차를 거쳐야 했지만, 나는 계속 여기서 살 예정인데, 내 집을 새 매수 희망자에게 구경시키라고?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집주인이 갑인 당시 분위기상 거절하기도 힘든 요구였다. 일단 알았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이 빌라가 위치한 연남동이 들썩이고 있었다. 경의선 철길 공원화 공사가 거의 막바지에 이르면서 땅..
7-3 집주인, 상속인, 새주인 1 사실 연남동에 방 세 개짜리 전세를 구하면서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중개인이 위임장도 없이, 자기랑 계약서를 쓰면 된다고 우겼던 것이다. 입금만 집주인에게 하면 되는 거 아니냐면서. 요즘도 그런 경우가 있을 것이고, 사기를 당하는 사람도 있고, 무사히 넘어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때 비록 젊었지만 꽤 조심스러운 성격인 데다가 몇 번 중개인의 농간을 경험한 터라, 절대 안 된다고, 주인을 직접 만나서 계약서를 써야겠다고 우겼다. 그래서 저녁 무렵 만난 중개인과 나는 중개인의 자가용을 타고 멀리 집주인의 자택으로 갔다. 집주인이 몸이 아파서 밖에 나올 형편이 아니라고 했다. 중년이 넘어 보이는 여성분이 누운 채로 우리를 맞이했다. 몸이 아파서 이런 꼴이라 미안하다고 했지만 그다지 병색이 드러나 ..
7-2 연남동 인테리어 요즘 글쓰기 모임이 죄다 마포구에서 개최되고 있다. 숭례문 앞에서 모이던 이들은 서교동을 거쳐 서강대 앞으로, 종로와 대학로의 모임도 내 주도하에 홍대로, 기존의 망원동 모임은 그대로, 게다가 난 결국 홍대 앞에서 네번째 모임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그러다보니 요즘 나의 주 활동 무대, 즉 ‘잡다한 업무처’도 명동 일대에서 다시 홍대 쪽으로 옮겨가고 있다. 시청이나 종로 주변까지 매번 걸어다니다가, 요즘에는 거의 매일 지하철을 타고 서쪽으로 나오고 있다. 내가 15년을 살던 홍대를 떠나온 게 30대 중반이었는데, 이제 십년만에 다시 귀향 준비를 하는 건가 하는 기분도 든다. 십년전에, 내가 홍대 인근에서 마지막으로 살던 집은 연남동의 다세대 주택이었다. 그때의 연남동은 아직 공원이 생기기 전이었다. 경의선..
7-1 방 세 개에 대한 편견 보통 집을 구하러 부동산 중개업소에 가면, 구매자는 구하는 집의 형태와 함께 금액 예산을 중개인에게 제시한다. 그런데 그것과 상관없이 늘 듣는 질문이 있었다. “식구가 몇 명이에요?” 처음 들었을 때는 그냥 대답했다. “저 혼자요.” 그러면 나오는 중개인 반응이 내가 원하는 방향이 전혀 아니었다. “그럼 좀 작아도 되겠네.. 이런 집 어때요?” “아뇨, 저 큰 집 필요해요.” 이런 문답을 몇 번 거치고 나서 중개인이 그런 질문을 하면 나는 반문을 하게 됐다. “식구 수는 왜 알려고 하시는데요?” “아니, 그거야 그래야 크기를…” 물론 질문의 의도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상대방의 욕구를 사회 평균에 맞추어 가늠하려는 시도. 즉 구체적인 몇 가지 질문을 더해서 상대방의 욕구를 알아내려 하는 게 아니라, 통..
6-4 차익을 남기는 부동산 매매 엉겁결에 구매한 내 생애 첫 집, 18평짜리 나홀로 아파트 10층에서 5년 정도 살았다. 그 사이 망원동은 슬슬 좋아지고 있었고 ‘장마 오면 물에 잠기는 동네’라던 악평도 점차 잊혀 갔다. 그래도 아직은 망리단 길이니 뭐니 하며 힙스터들이 유입되기는 한참 전이었고 거리에는 카페 한 군데 눈에 띄지 않던 시절이었다. 18평이 점차 좁게 느껴졌다. 탁 트인 전망도 시들해졌다. 전망 같은 건 없고 좀 어둡더라도 넓은 집에서, 잠자리도 좀 넓게 펴고, 옷가지와 책장들도 여유 있게 보관하고 싶었다. 친구들에게 아파트를 팔고 빚을 갚은 다음, 전세로 빌라에 들어갈 거라고 떠들고 다녔다. 다들 말렸다. 지금 한창 부동산 가격이 오르는 중이라고 했다. 오랫동안 이보다 더 열악한 집에 살며 가격이 더 오르기만을 참고 기..
6-3 동네 친구, 동네 이웃 요즘 디엠비 엠비시 라디오라는, 광고 없고 진행자 멘트도 없는 공짜 음악 방송을 발견하고서 즐겨듣고 있다. 오전에는 팝송, 오후에는 케이팝, 저녁 시간에는 옛날 가요들을 틀어주는데, 그러다가 가수 김현철의 스무살적 노래를 정말 오랜만에 다시 들었다. 멜로디도 가사도 옛날 알던 그대로였지만 웬지 가사가 심상치 않게 낯설게 느껴졌다. 김현철 ‘나의 동네’ 짧지 않은 스무 해를 넘도록 음 소중했던 기억들이 감춰진 나의 동네에 올해 들어 처음 내린 비 내가 걷는 거리 거리 거리마다 오 나를 믿어왔고 내가 믿어가야만 하는 사람들 사람들 어떻게 저렇게 젊은 나이에 자기 동네와 동네 사람들에게 대해 저런 애정을 가질 수가 있지? “내가 믿어왔고 믿어가야만 하는 사람들”이라… 지금은 전혀 아니지만, 어쩌면 젊은 시절에..
6-2 집주인이 된다는 것 처음 그 집에 들어갔을 때가 기억난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파트의 10층으로 올라가면, 샷시가 설치되지 않은 콘크리트 난간의 공용 복도가 이어진다. 북향의 복도에선 여름인데도 강한 바람이 몰아쳤다. 콘크리트 난간 너머로는 탁 트인 풍경속에 나지막한 망원동 빌라촌의 풍경이 내려다보이고 멀리 월드컵경기장과 난지도공원까지 눈에 들어왔다. 1001호 현관으로 들어서면 바로 옆에 창살 박힌 창문이 난 작은 방이 있다. 그 앞에서 시작된 좁은 부엌 겸 복도(주의: 부엌 겸 거실이 아니다. 거실은 없는 집이었다)를 지나 앞쪽으로 나가면 푸른 하늘이 확 펼쳐진 전망 좋은 큰방이 나온다. 난 큰방의 전망을 보는 순간 사랑에 빠져 버리고 말았던 것 같다. 사실 아주 드문 종류의 집이었다. 서울 부도심에 얼마 남지 않은, ..
6-1 망원동 나홀로 아파트 홍대앞 원룸의 전세가 2년이 지나자 정확히 두 배 올랐다. 상냥한 주인 아줌마는 미안하다며, 나머지 돈은 월세로 내면 된다고, 싱글벙글 권했다. 주변 부동산에 알아보니 그녀가 지나친 가격을 부른 게 전혀 아니었다. 나는 홍대앞에서 계속 살고 싶었다. 살아야 했다. 단골 술집이 모두 홍대앞에 있었고 다른 곳에서 만나는 친구나 지인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대부분의 친구들이 그랬듯이 다른 곳에 살면서 홍대앞으로 놀러 나와도 되지만, 늘 술자리에 ‘끝까지’ 남던 나는 자정 전에 집에 들어가는 일이 없었고 다른 곳에 살다간 심야 택시비가 더 나올 터였다. 홍대앞으로 걸어다닐 수 있으면서, 집값이 싼 지역 중에, 지하철이 있어 출퇴근도 편한, 망원동이 눈에 들어왔다. 주변에 의견을 묻자 반응은 한결 같았다. “거기..
5-3 둘만의 집들이 나의 엉망진창 집들이 파티가 끝나고 나면, 미처 참석하지 못했던 친구들은 개별적으로 내 집을 찾아와서 술판을 벌이곤 했다. 독립해서 사는 친구 집은 일종의 공짜 술집으로 변해버리던 시절이었다. 다들 전형적인 패턴이었던 가운데, 꽤 특이했던 한 친구의 방문이 기억에 남는다. 의외로 친구들중엔 나처럼 홍대앞에 사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부모와 계속 살든지 아니면 좀 더 좋은 집을 찾아 도심에서 멀리 나가서 집을 구하곤 했다. 그녀는 마침 서교동에 사는 친구였다. 나의 집에서 몇백미터 떨어진 곳에서 부모와 함께 살았다. 하지만 지독한 직장을 다니고 있던 터라 나의 집들이에도 오지 못했을 뿐 아니라, 내가 이사하고도 한동안은 방문을 못했다. 어느날 갑자기 전화를 해서 드디어 일찍 퇴근하노라고 했다. 집 앞 가게..
5-2 청춘의 이사와 집들이 대학가에서 첫 분홍 원룸을 얻을 때도 그랬지만, 직장 생활을 시작하며 홍대앞으로 이사를 왔을 때도, 나는 이웃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사실은 가족도 안중에 없었다. 멀리 떨어져 살든지, 가까이 살든지, 나의 청춘 생활은 온통 또래인 친구들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나이가 든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왜 그래야 했을까 싶다... 인간이라는 사회적 동물은 다양한 세대의 성원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하는 건데, 왜 젊은이들은 다른 세대를 배척하려는 습성이 있을까? 뭐, 어차피 이 문제를 여기서 고민할 수는 없고,,, 어쨌든 당시 나의 이웃은, 매달 관리비를 바쳐야 하는 집주인 아줌마뿐이었으며, 나의 가족은, 전세금을 받은 조건으로 매주 방문해야 하는 부모님이 전부였다. 그리고 인간 관계에 대한 나의 유일한 관심사..
5-1 홍대앞 원룸 대학 때 어리버리 친구와 처음 홍대앞에 구경 간 이래, 홍대앞에 살아보는 건 나의 오랜 꿈이었다. 미대생들이 만든(?) 멋진 도시, 인디 뮤지션들이 활동하는 거리, 저녁 때면 예비 미대생(미술학원생)들이 앞치마에 물감을 잔뜩 묻히고 간식을 먹으러 삼삼오오 몰려다니는 동네. 학교를 다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간 지도 좀 돼서야 드디어 나도 홍대앞에서 집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홍대 정문에서 양쪽으로 펼쳐진 주택가인 동교동은 그 당시만 해도 실제 거주지로 쓰이는 곳이 많이 있었다. 물론 집값은, 원룸이라고 해도 좀 비쌌다. 부동산의 소개로 동교동의 기묘한 집들을 많이 구경다녔다. 전형적인 다세대 빌라도 있었지만, 커다란 단독 주택에 억지로 칸막이를 만들고 세를 놓은 집들도 꽤 있었다. 평범한 살림살이도 있었지..
4-2 부모의 돈 원래 나의 첫 집이 이렇게 예쁘장한 곳이 될 예정은 아니었다. 대학원 마지막 학기에 부모의 집을 나오기로 결심했다. 그 전 1년 동안을 집에서 밥을 먹지 않고, 아침 일찍 나가 밥 늦게 들어가서 잠만 자는 생활을 했다. 여러 개의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꽤 모았다. 그렇게 1년을 살다가 벼룩시장(아는 사람은 알 거다)을 뒤졌다. 학교 앞 어느 허름한 주택에 방 한 칸을 월세로 빌렸다. 그리고 나가겠다고 부모에게 통보했다. 1년 만에 말을 하는 자리였다. 독립해 살면서 6개월 동안 석사 논문을 쓰고, 바로 취직할 예정이라고 통보했다. 아버지는 침울한 표정으로 잠시 아무 말 하지 않더니, 의외의 말을 했다. 전세금을 줄 테니 제대로 된 원룸을 얻으라고 했다. 대학원 학비조차 대주지 않던 분이 그런 거금을? ..
4-1 분홍 원룸 그 동네는 흔히들 ‘이대 후문’ 혹은 봉원동이라고 부르는 대학가 원룸촌이었다. 부유한 여대의 인근이라 그랬는지 다른 대학가보다 예쁜 집들이 많았다. 나의 첫 집이 된 건물도 분홍색 파스텔톤 외양에다가 특이한 구조로 지어진 집이었다. 처음 부모에게서 독립해 살게 된 집을 보통 자취방이라고 부르지만 나는 그러기 싫다. 화장실과 부엌이 별도로 있고 공과금도 내가 벌어 내는, 엄연한 나만의 집이었으니까. 다만, 현관은 다른 세대와 공동으로 사용해야 했고 전세금도 부모님이 주셨다. 나는 부모님 집 내 방에서 책장과 책상, 옷장을 몽땅 끌어냈다. 그래봤자 1톤 트럭이면 충분했다. 친구인 남자들을 모두 불러모았더니 열 명 정도 됐다. 서로 모르던 사이가 대부분이라 뻘쭘해 하면서도 열심히 책짐을 날라줬다. 몇십년의 세..
3-2 나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에서 여성이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방과 한달에 50만원의 돈이 있어야 한다고 했던가. 나로서는 그 이상의 것이 주어진 지 한참이 지난 후인 지금에야 이렇게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현대인에게 나만의 방과 최소한의 생계비는 단순히 글을 쓸 수 있기 위한 조건을 넘어 기본 생존권이 돼가는 것 같다. 다행히 나는 사춘기가 되었을 때 나만의 방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주택에만 살던 우리 가족이 아파트를 분양 받은 덕분이었다. 80년대 후반, 논밭이던 교외 지역에 새로 지어진 대단지 아파트였다. 삭막하고 몰개성했지만, 그곳에서 나는 사춘기와 청춘기를 편하게 보냈다. 강릉으로 이사 갔던 열다섯 살 때, 여름 방학이 되어 잠시 서울로 올라왔다. 엄마가 무슨 볼 일을 보러 서울에 ..
3-1 신시가지 아파트 아버지가 다시 서울로 전근 오면서 나는 중학생 때 처음으로 아파트에서 살게 됐다. 서울 남서쪽 변두리에 조성된 대단지 아파트였다. 사실 서울의 남서쪽은 나와 동생이 태어난 이후 계속 살아온 곳이었다. 외가쪽 친척들도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다. 그래서 나의 부모님도 그곳을 선택했던 것일 테다. 대부분의 친구들과 인맥, 단골 가게도 모두 남서쪽에 있었으니까.하지만 그 전까지는 마당 있는 집들이 이웃해 있고 골목을 돌아서면 가게가 나오는 동네들에서 살아왔는데, 아파트 단지는 너무 희한한 풍경이었다. 똑같은 베이지 색 성냥갑(아는 사람은 알 거다) 건물이 양옆으로 수없이 늘어선 보행로를 지나,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올라’오면, 창밖으로는 창살 쳐진 수많은 다른 집 창문들이 아래위로, 좌로 우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