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엉망진창 집들이 파티가 끝나고 나면, 미처 참석하지 못했던 친구들은 개별적으로 내 집을 찾아와서 술판을 벌이곤 했다. 독립해서 사는 친구 집은 일종의 공짜 술집으로 변해버리던 시절이었다. 다들 전형적인 패턴이었던 가운데, 꽤 특이했던 한 친구의 방문이 기억에 남는다.
의외로 친구들중엔 나처럼 홍대앞에 사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부모와 계속 살든지 아니면 좀 더 좋은 집을 찾아 도심에서 멀리 나가서 집을 구하곤 했다.
그녀는 마침 서교동에 사는 친구였다. 나의 집에서 몇백미터 떨어진 곳에서 부모와 함께 살았다. 하지만 지독한 직장을 다니고 있던 터라 나의 집들이에도 오지 못했을 뿐 아니라, 내가 이사하고도 한동안은 방문을 못했다.
어느날 갑자기 전화를 해서 드디어 일찍 퇴근하노라고 했다. 집 앞 가게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지쳐보이는 얼굴로 곧장, 식료품점이었던 가게로 들어가 이것저것 집기 시작했다. 과자를 한 아름, 빵 한 아름, 소시지 몇 통, 건어물 몇 봉지, 아이스크림 한 아름, 음료수를 몇 병이나. 나는 이 많은 걸 어떻게 (둘이) 먹냐며 말렸다.
하지만 그녀는 들은 척도 않고 모두 계산을 한 다음 나의 원룸으로 들어와 냉장고를 차곡차곡 채우고, 내가 내놓은 독특한 스파게티는 거절한 다음, 빵, 과자, 소시지, 건어물을 차례차례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을 실컷 먹어야겠다는 거였다.
물론 아무리 그래도 냉장고에 넣은 아이스크림과 음료수까지 다 먹을 배는 없었다. 친구는 한참 먹고 이야기를 마치더니 집에 가서 자야겠다고 일어섰다. 그리고 나의 냉장고를 열어 자기가 사온 아이스크림과 음료수를 다 꺼냈다. 그리고 다시 봉지에 담더니 자기 집으로 가지고 갔다.
나와 내 친구들이 서른도 안 되었던, 젊디젊던 시절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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